제1장: 저무는 겨울, 차가운 봄

1. 겨울의 끝

1001.

 “당신 같은 사람이 직접 올지는 몰랐는데.”

 “어이쿠, 이런 일이니까 직접 오는 거지. 나야말로 몰랐다네. 우리 IOP 제조회사의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하려든 사람이 이렇게 어린 꼬마아이일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거든.”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었고, 소년은 조금도 웃지 못했다. 반항기 어린 눈길을 받으며 하벨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래, 인상 깊어. 그러니 이제 자네의 뛰어난 자질을 눈여겨보고 스카웃하면 되는 겐가?”

 “이미 난 팔린 몸이야. 당신도 알잖아. 애당초 그래서 여기 온 거겠지. 날 본 게 아니라, 내 주인을 보고서.”

 텅 빈 금속이 바닥과 맞부딪치는 것처럼, 소년은 살짝 긁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렇게 자란 머리카락에 얼굴이 그늘졌음에도 보안 요원에게 얻어맞은 흔적은 미처 가려지지 않았다. 하벨은 그의 노구를 살짝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부정하진 않겠네.”

 “마스터는 어딨어?”

 하벨은 서론을 말하려고 입을 벌렸고, 소년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즘 시대에 보기 힘든 참 갸륵한 마음씨군. 나도-“

 “안젤리아.”

 하벨은 서론을 더 말하려 했고, 소년은 본론을 꺼냈다.

 “내 주인은 도대체 어디 있어?”


 이 땅에서 12년 만에 붕괴액이 기폭한지 정확히 13주가 지난 날이었다. 그리고 그리폰&크루거가 알 수 없는 하얀 세력에게서 지휘관을 구출한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난 날이기도 했다.

 “모른다, 라고 한다면 믿어주겠나?”

 “그 대답을 들은지도 같은 시간이 지났어. 그래서 직접 알아보기로 한 거야.”

 “흥, ‘요즘 젊은 것들은’ 하고 운운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인 거 아나? 터무니 없이 혈기왕성하군. 솔직히 보안 경고가 울렸을 땐 가슴이 철렁했네. 지금 같은 흉흉한 시국에 그런 장난은 좋지 않아.”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하벨은 조금, 아주 조금 당황했다. 소년이 반응한 지점이 예상과 다른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이게 장난처럼 보이냔 상투적인 말 대신 이 꼬마는 다른 말을 꺼내 놓았다.

 “당신네들이 납품하던 회사가 실은 테러조직이었다, 불법 화기 유통에 군 측을 향한 발포 행위까지. 이런 이야기 말하는 거야? 확실히, 진짜 흉흉한 시국이긴 하지.”

 “뭐라고 부르면 되나?”

 자네 이름, 하벨은 그렇게 운을 뗐다.

 “데레라고 불러줘. 편하게 말하고 싶은 거면, 나도 당신 하벨 할아버지라 불러도 될까?”

 “그것도 이름인가?”

 “내 누나는 제레야. 뭐, 돌림자 같은 거. 알잖아.”

 데레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벨도 마주 그리하며 입을 열었다.

 “데레 군.” 하벨은 잠시 입을 다물었고, 다시 열었다. “힘들 거라고 생각하네.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지. 갑자기 주변 사람이 실종되고,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 하나 없는 건 충분히 심적으로 힘든 일이네.”

 “다 좋은데, 날 아무것도 모르는 얼간이처럼 대하진 마.”

 기분 나쁘거든, 그 조막만한 입 사이로 악문 치아가 보였다. 자넬 꼭 닮았군, 안젤리아.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향해 하벨은 속으로 뇌까렸다.

 “미안하네. 안젤리아에게서 자네 남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어도, 자세한 사정까진 몰랐으니 말이야. 좋아, 자네 고용주가 국가 안전국 소속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알 만큼은 알고 있어. TV에서 하는 소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서, 고작 인형 두 기만으로 군대를 막으라는 터무니 없는 명령이 있었단 사실까지.”

 “그래, 그럼 뭐가 더 궁금하나? 내 생각에 자네는 이미 충분히 아는 것 같네만.”

 “왜?”

 이해하는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모르는 건 ‘왜’야.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이 내려졌고, 왜 끝내 마스터가 실종되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왜 정규군은 이상행동을 보였던 건지. 마스터가 지금 당장 어디에 있는지만큼이나 묻고 싶은 것들이지.”

 하벨은 난처하단 뉘앙스의 몸짓을 취했다.

 “안젤리아는,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네만, 반역자 혐의를 진 몸일세. 이 시점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얼마 되지도 않아.”

 “또는 ‘그런 것으로 되어있거나’. 여기서 묻고 싶은 것 하나 더, 그렇다면 왜 ‘테러조직’ 그리폰&크루거는 안전국의 산하에서 움직이게 되었을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나, 하벨은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안젤리아가 운용하던 그 용병 소대. 한 달 전, 전술지휘관 구출 작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 소대.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이 꼬마는 분명 그들의 기술적 지원을 맡고 있으리라. 자기 회사의 보안을 모조리 뚫어버린 걸 생각하면, 적어도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만큼은 확실하게 알겠지. 인형 몇 기의 블랙박스를 조회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더욱 곤란한 것일세. 자네는, 결국… 민간인이잖나.”

 하벨의 그 말에 데레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했다.

 초조함,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시선, 손톱 물어뜯기가 있었다.

 “알고 있네. 이런 식으로 선을 긋는 게 잔인한 일이란 건 말일세. 나는 안젤리아를 오랫동안 봐왔으니 더욱 그러한 걸 잘 알고 있지. 앞서 말했듯 직접 입에 올린 적은 많이 않았지만, 자네들 남매를 거둬들인 때 이후로… 그 전과 비교할 때 사람이 많이 긍정적으로 바뀐 걸 느꼈으니.”

 “그러니까.”

 파란 눈알이 살짝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살아는 있는지라도,”

 “그러니까, 믿어주게.”

 하벨은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내가 그녀를 믿는 것보다도 훨씬 더, 자네는 안젤리아를 믿고 있을테니까.”

 부탁함세, 하벨이 그렇게 말을 뗀 직후 그의 정장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보호자…가 온 모양이군.” 액정을 확인한 그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게. 그녀를 생각하는 자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가끔은 그런 자네를 마음 쓰는 사람도 신경 써주게.”

 데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어?”

 거처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남매는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누나도 동생도 서로 모르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불편한 침묵만이 자욱이 깔려 있었고, 결국 도착하기 직전, 아파트 입구에 다다르고 나서야 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가?”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그렇다면 왜 넌 아무것도 안 하는데, 제레?”

 또 다시 불편한 침묵.

 “이런 일까지 벌일 필요는 없었잖아. 나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서버실까지 직접 뚫고 들어가다니.”

 “필요하면, 언제든 그럴 수 있어. 그리고 오늘은 필요했을 때였고.”

 “도대체 뭐가 필요한 건데, 데레. IOP 무작정 처들어갔다가 얻는 거 없이 들켜서 맞고 돌아오는 거?”

 “나만 절실한 거야?”

 동생은 누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만 마스터가 걱정되서 어쩔 줄 모르는 거야?”

 “나도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그렇담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건데?”

 데레는 피로한 듯 시선을 내린 채, 입구 계단 맡에 앉으며 물었다.

 “404? 그 구출작전 이후로 일 없잖아. 한 달 동안 우리 제대로 모인 적 있어?”

 “일주일에 한 번 정돈 알아서 유지보수 하러 오잖아. 네 말대로 일만 없을 뿐이지.”

 “그래, 각자 개별활동하는 게 휴가가 따로 없네. 그러니 나도 개별활동한 것뿐이고.”

 “우리는 남이 아니야, 데레.”

 그리고 제레도 입구 계단 맡에 앉았다.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려 자기 동생을 쳐다봤다.

 “둘밖에 없는 가족이지.”

 “엄청 상투적인 말인 거 알면서 한 맞지?”

 “맞아. 그러니까 누나가 동생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냔 상투적인 말도 할 거야.”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정상적이게 됐어?”

 한 번 더 정적. 동생도 누나도 작금의 말을 한 차례 곱씹었다.

 “우린 아무것도 믿지 않았잖아, 제레. 기억 나?”

 “어떻게 잊겠어. 우린 그 저택에서 10년은 살았는데.”

 “나와서도 몇 달은 더 그렇게 살았고. 마스터와 만나기 전까진.”

 “서로 아는 사연을 굳이 짚는 이유가 뭐야?”

 “같은 일을 겪었으니까, 이렇게 하면 이해가 될 거라 생각했어.”

 남매는 열일곱 살이었다.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년도에 태어났음을 뜻했다. 이 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몸에 맞지 않은 상복을 입고서 누군지도 모를 자기 부모의 빈소에 있던 일이었다. 어린아이가 자라나는데엔 많은 것이 필요하다. 남매에겐 오직 돈만이 있었다. 다섯 살 짜리 꼬마들이 제대로 쓸 수 있을 리 없는, 쓸데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몇 멍인지 기억 나? 부모님 친구였다, 친척인데 기억 안 나느냐, 은사였다, 직장 동료였다… 그런 식으로 왔던 사람들 말야.”

 “세다가 그만뒀어. 넌 어떤데, 데레?”

 “세 자릿수는 안 되는 게 다행인 건지 모르겠다.”

 살기 위해선 조숙해져야 했다. 대부분의 경우는 한몫 챙기기 위해 찾아왔고, 가끔 ‘나는 고아들을 챙기는 좋은 사람’이란 선전을 위해 얼마간 거두고 다니는 부류 또한 왔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는 법, 조금이나마 오래 보호자로 있을 사람을 잡으려 애쓰며 남매는 15살까지 살았다.

 열다섯 겨울에 일어난 철혈폭동은 그런 삶까지 날려버렸다.

 “그랬던 우리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살게 됐어?”

 “무슨 말하고 싶은지 알겠어, 데레. 그건 나도 동감하는 거고. 하지만,”

 제레는 문득, 자기 동생에게 손을 뻗었다.

 톡, 쓰라리게 닿아온 손가락이 찼다.

 “내겐 네가 더 중요해.”

 “그것도 상투적인 말이네.”

 “…그렇게 꼭 삐딱하게 봐야해?”

 대답 대신 데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좀 있다 들어갈게. 그렇게 많이 안 늦을 거야.”

 그냥 들어오라고 말하려다, 제레는 열린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한참동안, 동생이 간 뒤에도 누나는 계단 맡에 앉아있었다.


 …세 달, 그리고 조금 남짓.  헬리안은 대중의 관심이 생각보다 빨리 소강되었단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폰&크루거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올 적엔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시피 했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었다. 인구 밀집지역에 갈 땐 여전히 마스크와 선글라스가 필수지만, 이런 외곽 지역의 카페에서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다행스럽게도 없었다.

 늦은 저녁을 대신하는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그러나 정작 손도 안 대고 있었다. 자리를 잡자마자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연락을 시도했다. 모든 운송수단이 몰수되어 발이 묶인 지휘관 측을 대신하여, 헬리안은 외부에서 정보를 얻어내는 역이었다.

 정기연락 시간, 하지만 그 순간 얄궂게도 배터리는 방전되고 말았다.

 “저기, 혹시 핸드폰 충전기 있습니까?”

 카운터에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부정적인 대답뿐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을 국가안전국에게 감시당하는 지휘관에게 도청 위험이 없는 연락을 받을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고, 그것이 헬리안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때,

  “어, 그… 괜찮으시면 제 전화 쓰셔도 괜찮은데….”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남자아이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내밀어왔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열일곱 살? 평소 같았음 사양했겠지만, 헬리안은 무언가를 가릴 처지가 못되었다. 양해를 구한 그녀는 서둘러 지휘관과의 연락을 시도했다.


 완벽한 접근이었다. 통화 내용이 정상적으로 녹음된 걸 확인하고서, 데레는 그렇게 생각했다.

요양병원에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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