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저무는 겨울, 차가운 봄

프롤로그

분기점

달리던 발걸음이 잦아들었다. 차츰차츰 느려지다 이내 그친 걸음을 뒤따르던 발자국은, 속절없이 내리는 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수가 쏟아져 내린다 한들 이토록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빗줄기에 맞는 것이 아프다 하면 보통 과장이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결코.

시체의 상태는 온전했다. 붕괴액의 영향을 직접 받고도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리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스스로의 말을 곱씹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그저 오랜 도피행에 지쳐 잠든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석비에 기댄 그 모습은 조금 창백하고, 조금 수척해 보일 뿐이니까.

뻑뻑한 눈알을 겨우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가 내리는 꼴이 안개처럼 보였다. 태양도 달도 보이지 않아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질척이는 빗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숨을 들이쉬고 있음에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허공에 질식하는 것처럼.

나흘 전, 간신히 듣게 된 소식에 나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설령 가본다 한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나는 열차에 올랐고, 국경을 넘었으며, 맹목적으로 충동을 따라간 끝에,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어.”

어깨를 때리는 비는 매서웠다.

“…마스터.”

힘겹게 내뱉은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다.




정신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특히 지난 나흘은 더욱 그랬다. 눈코 뜰 새 없는 사건과 격전의 연속을 되짚던 장시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은 끝났다. 본국, 신소련으로 돌아가는 열차에서, 객석에 파묻히듯 기대앉은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쉴 수 있었다. 비록 베오그라드 곳곳이 파괴되었지만, 시민들은 무사히 대피시킬 수 있었다. 방벽도 복구 작업에 들어갔고, 철혈공조도 물러갔다. 그 하얀 세력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조금,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져 잠들기 직전, 장시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 말도 안 되는 일인데.

‘현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알려진 그리폰&크루거에 대한 IOP 제조회사의 지원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도착까지 이틀이 걸렸다. 그녀의 세계가 뒤집히는데 걸린 시간 또한 그러했다.

공기가 얼어붙었고, 숨이 일순간 멈췄다. 예상치 못한 날벼락이란 이런 것일까 싶을 만큼 기습적이었고, 예상을 너무 벗어난 방식으로 찾아와 황당하기까지 했다. 장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언론은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선포했다.

역에 있는 스크린에 드리운 뉴스는 여러 글귀를 내뱉었다. 5개월 전부터 누명이 씌워진 혐의 – 불법 인형 개조 및 화기 유통, 군 측을 향한 테러 등 –를 비롯한 아는 소식들이 나왔고, IOP와 그리폰 사시의 관계에 주목하는 추측도 나왔다. 유출된 내부 문건이나 녹음 파일을 비롯한 모르는 소식 또한 나왔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상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알리는 것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손목만 움직여 꺼낸 그것을, 장시안은 눈알만 굴려 확인했다.

안전국의 연락이었다.

[대기하라.]

통신 너머의 목소리는 단호하게 떨어졌다. 지나칠 정도로 간결한 탓에, 그 정도의 단호함을 품지 않았다면 무슨 말인지 되물을 뻔했다. 장시안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로운 지령도, 정보도 없이, 그저 ‘대기하라’라는 말 앞에 그녀는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호출에 응한 장시안은 서둘러 IOP 제조회사 사옥 S11 지부 향했다. 5개월 전, 정규군 특수작전사령부의 공격을 피해 모든 그리폰 병력의 도주 포인트로 설정되었던 그곳은, 현재 IOP의 지원 하에 새로운 기지가 마련되어 그리폰의 사령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유리를 통해 사옥 밖에 몰려든 기자들의 모습을 본 장시안은 종이가 구겨지는 듯한 압박을 느꼈다. 서둘러 벗어나듯 회의실로 들어가자, 장시안을 맞이한 건 회의실 화면 너머의 젤린스키와 힘없이 앉아있던 하벨이었다. 늦었다는 핀잔,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라는 선언과 함께.

굳어버린 장시안을 대신하여, 하벨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보게, 젤린스키 양반…. 알잖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 IOP 측은 더는….”

[그리폰을 지원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건 이미 알고 있다.]

장시안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래서? 모르는 건 아니니까 그냥 그런 줄 알라고? 튀어나오려는 반문을 애써 삼키면서 그녀는 젤린스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동시에, 당장 지원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 어차피 베오그라드에서의 활약에 대한 포상 휴가를 내릴 생각이었다. 돌발상황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현장 판단을 통하여 민간인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또 주석까지 구출해낸 그 공로는 확실히 인정할 만한 것이니까.]

개소리를 이보다 더 그럴듯하게 할 순 없을 것이다. 젤린스키의 그 말은 다른 방식으로 장시안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분명 알고 있을 텐데. 그리폰의 모든 인원이 범법자로서 사회 활동이 완전히 불가능하고, 자체적인 교통수단은 죄다 압류 혹은 파괴당한 상태에서 보급까지 끊기게 된다면,

포상 휴가? 꼴에.

말려 죽게 내버려 두는 걸 저렇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게 끝은 아닐 테지? 자네 입으로 말한 그 베오그라드에서의 사건으로 안전국 측의 인력이 크게 줄어들었는데, 그 ‘공로’를 세운 이들을 내팽개쳐봐야 제 살만 더 깎아 먹을 뿐일세.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이후 있을 처분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판단한다.]

하벨의 흥정에도 불구하고 젤린스키의 태도는 냉정했다. 그는 애당초 장시안이 이 방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알아만 두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철저히 그녀를 대화에서 배제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지. 별도의 명령을 전달하기 전까지 그리폰&크루거의 모든 병력은 대기 상태를 유지하도록. 애당초 이건 자네들이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까 말야.]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통신이 종료되었다. 공기가 가라앉은 듯한 어색한 침묵이 내려왔다.

그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것처럼, 하벨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군. 유감스러운 일일세, 그리폰의 지휘관.”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의도하신 바가 아니니까요.”

겨우 입을 연 장시안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서 있었다. 방에 남겨진 두 명 모두 자신의 역량을 넘은 문제에 부딪쳤고, 이 상황에 대한 원망이나 책임을 서로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진짜 원인은….

하벨은 노구에 몰려오는 피로를 느끼며,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젤린스키, 그 양반이 워낙 말을 못 하는 만큼 이 내가 상황을 나름대로 풀어 말해줘야겠구먼. 괜찮겠나?”

“부탁드립니다. 저희로선 정말 지푸라기라도 닥치는 대로 잡아야 할 처지니까요.”

“젤린스키 양반이 저렇게 태연한 이유는, 실질적으로 안전국 측에게 가해지는 피해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네. 아니, 오히려 자기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기회일지도 모르지.”

IOP 제조회사, 인형 사업을 독점함에 따라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기업이다. 신소련 정부는 분명 이번 사건을 빌미로 그 위세를 눌러놓을 것이 분명했다. 국가 전복을 꾀했단 말을 덧붙인다면 그의 회사가 국영화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정치판을 오랫동안 지켜본 하벨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우리 둘 다 현 정부와 관련된 기밀을 여럿 알고 있네. 그들이 자네들을 나름대로 등용하여 쓴 이유도 그 때문이지. 예를 들어… 카터, 그 친구가 꾀한 정규군 내 내부분열 같은 것 말일세. 안전국의 입장에서 자네는 풀려나선 안 될 비밀을 쥐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셈이지.”

그래서 포섭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리라. 그마저도 하벨이 나름대로 힘을 쓴 덕분에 성립된 것이고. 장시안은 석 달 전, 패러데우스에게 납치되었던 때를 떠올렸다. 겨우 풀려난 직후 그녀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받았다. 안전국 밑에서 일할 것이냐, 아니면 당장 숙청 당할 것인가.

그런 최소한의 편의마저 이제 더는 봐줄 필요가 없어진 걸까.

“미안하게 됐네. 이제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건 언론의 추궁이 자네들까지 다다르지 못하도록 시간을 끄는 것뿐일세. 물론 페르시카, 그녀를 통해 우회적으로나마 힘을 보태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벨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없었다. 그는 장시안을 바라보았다. 이젠 자신의 운명 또한 그녀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을 체감했다.

“…앞으로 IOP 제조회사는 그리폰&크루거 앞으로 어떠한 물자적 지원도 할 수 없네. 최소한 당분간은 말이지. 기껏 제공한 기지도 더는 쓸 수 없을 거야. 언론의 추적은 집요할 걸세. 악담은 환담과 달리 집요하기 짝이 없으니까. 훗날 그 추적을 떨쳐내어 자네들을 다시 도울 수 있으려면, 우선 그 치들이 꼬투리 잡을 거리를 최대한 없애야만 하네.”

그래서 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이 상황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권력이란 무형의 힘, 그것이 마비된 이상 하벨은 그저 늙은이에 불과했다.

“…그럼, 슬슬 일어나겠네. 이제 벌떼처럼 몰려온 기자들을 상대해야겠지. 약간의 꿀을 뿌려야만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건투를 비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금속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음울하게 퍼졌다. ‘IOP와 그리폰의 미래를 부탁하네’, 그 말을 자신의 자리에 대신 앉혀놓은 채 하벨은 사라졌고,

장시안은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

- 혼자 있고 싶어.

지휘부에 도착하자마자 그 말만 하고서 개인실에 틀어박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보는 지휘관의 차가운 모습에 의아해하는 인형들의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쓸 수 없었다. 처음으로, 장시안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만 하잖아. 다섯 달 전부터, 정규군의 배신, 하얀 세력의 등장, 납치, 감금, 심문, 석 달 동안의 수색, 그리고 타국에서 벌인 작전. 충분히, 계속해서 힘냈잖아. 그러니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정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는, 정말 뭘 하면 좋은 걸까.”

망연히 흘린 중얼거림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문득, 귓전을 울리는 소리에 장시안은 개인 디바이스에 눈길을 줬다. 메시지가 한 통 와 있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도로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그것의 제목이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안젤리아. 짧은 이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메시지를 열람했다. 본래라면 베오그라드에서 만났어야 할 사람, 그 이름이 이것에 적혀있다면 혹시, 이 일 또한 그 사람과 연관이 되어있는 걸까?

메시지엔 내용이라곤 하나 없이, 첨부파일 하나만이 들어있었다. 저장과 함께 열람하자 이내 화면에는 글자판이 꽉 채워졌다.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장시안은 이내 그것이 누군가의 ‘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 건지 모른다. 무의식적인 현실 도피였던 걸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그녀는 모니터가, 그 안의 글자판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소년이 최초의 ‘신’을 마주한 이야기였다….

요양병원에 가고 싶습니다.

장연화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소녀전선 AU: 리틀 피플

0개의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새로운 알림이 없습니다.